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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역사를 향한 거침없는 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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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학적 과업으로서의 설교 설교는 해석, 주석, 그리고 적용으로 구성된다. 해석은 고대 문서를 현대인에게 의미있는 메시지로 받아들여지도록 해석해주는 해석학적 작업이다. 해석학의 기초는 고대언어다. 좀더 범위를 넓히자면 고대인의 역사, 관습, 법률, 세계관 등에 대한 포괄적인 배경지식이다. 이렇게 해서 해석된 고대 본문을 현대인 청중 독자의 삶에 적용시키고 상관시키는 작업까지 마쳐야 설교가 이뤄진다. 현대인의 언어, 관습, 세계관에 대한 이해없이는 설교는 효과적인 하나님 말씀 소통작용을 성취할 수 없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현세주의적이고 무신론적인 분위기에 젖어 사는 현대인에게 의미 깊게 상관시키고 소통시키는 일은 근본적으로 설교자의 고유과업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고유과업이다. 성경의 하나님은 스스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여기서 스스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설교자를 통해 알려지는 하나님 이해보다 더 우선시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설교자의 설교언어로 규정되는 분이 아니라 스스로 말씀하셔서 당신께서 잘못 대표되거나 대변되는 경우에 친히 간섭하신다. 스스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인간대변자들의 말과 행동에 제동을 거신다. 모압 왕의 돈에 매수된 자칭 타칭 국제저주신탁 전문가 발람이 가나안으로 쇄도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려고 저주신탁을 발설하려고 기도하는데 하나님의 간섭으로 축복신탁을 내게 된다(민 22~24장). 발람에게 간섭하신 것이다. 그런데 어느 한 순간에 발람이 하나님의 무장천사를 목전에 두고도 알아차리지 못하자 그의 나귀가 그를 공격해 영적 개안을 유도하기도 했다(민 22:21~35). 스스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성경이 제시하는 유일무이한 하나님 이해다. 스스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거짓 예언자들이 하나님을 그릇되게 대변하면 참 선지자들을 일으켜 하나님을 대변하게 하기도 하고, 성직자들이 타락해 하나님 말씀을 그릇되이 중개하면 평신도들을 일으키셔서 당신을 대변하게 하신다. 예레미야 선지자 시대에도 한 예언자가 받은 신탁을 마치 자신이 받은 것처럼 도둑질하는 거짓 예언자들이 있었다(렘 23:30). 거짓 예언자들은 다른 예언자의 신탁이나 예언을 표절하거나 도둑질하는 사람들만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 앞에 자신을 분식하고 치장하여 정직하고 의롭지 못하게 하나님을 대변하는 사람들이다. 예언표절의 핵심은 거짓을 일삼고 비도덕적이고 탈윤리적이고 사악한 사생활을 일삼고 사회적으로 불의한 세력을 위해 발언하면서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을 대변하는 언동을 하는 행위다. 설교표절 문제도 마찬가지다. 무겁고 중대한 설교 표절과 가볍고 사소한 설교 표절 거룩하시고 자비로우신 정결하신 하나님을, 세속적이고 잔인하고 부정한 설교자들이 대변하거나 대표하는 언동을 하는 경우가 심각한 설교표절이다. 거짓의 사람이 정직과 의로움의 언어를 독점하고 구사할 때 표절이다. 표절은 자기의 것이 아닌, 자기 수고의 산물이 아닌 것을 자기가 산출한 지적, 정신적 자산인 것처럼 마구 사용하는 행위다. 불의하고 지극히 오염된 설교자가 가장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을 대변하는 설교를 하는 행위가 가장 심각한 설교표절이다. 부패하고 타락한 설교자가 스스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구잡이로 인용하고 인증하며 하나님의 대변자처럼 행동할 때 그것은 심각하게 단죄된 거짓예언 행위다. 자신은 정작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거나 동행하지도 않으면서 하나님말씀을 직접 듣고 자신도 그 거룩한 하나님 말씀을 믿고, 신봉하고, 납득하고, 수용하는 것처럼 설교하면 그것은 심각한 표절이다. 어떤 목회자가 다른 선배 목회자나 이전 시대의 설교자의 설교를 그 원설교자의 저작권을 구두로 혹은 문서로 시인하고 그 설교문 원고를 중심으로 설교한다면 그 자체로 설교를 표절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이상적인 설교문을 갖고 설교연습을 했다고 보면 된다. 예를 들어, 고대 성경언어공부와 신학공부를 많이 한 목회자가 자신의 인격과 영성과 상관없이 많은 공을 들여 특정주제(사생활, 재정사용, 기도생활 등)에 관한 멋진 설교문을 작성해 회중에게 설교를 했는데 반응이 신통치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설교와 전혀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고 그리고 회중도 그런 사실을 알고 있기에 그의 설교와 그 자신은 몸에 맞지 않는 옷을 걸친 사람과 같은 결과가 나온 것이다. 불결하고 타락한 성직자에게 가장 거룩한 세마포 겉옷 에봇을 입혀놓은 꼴이다.그런데 신학공부, 성경언어 공부 등이 부족하지만 그 삶과 인격으로 이미 회중을 감화감동시키는 목회자가 그 박학다식한 설교원고를 갖고 그대로 설교를 했는데 회중 반응이 아주 좋았다. 이런 경우는 설교표절이 아니라 설교원고 차용인 셈이다. 설교는 설교원고를 읽는 것이 아니다. 삶의 전체적 지향을 담아 설교원고를 낭독하거나 읽는 행위가 설교의 진수다. 설교자가 설교원고보다 더 중요한 텍스트다. 그렇게 보면 위의 예에서 보듯이 진짜 설교표절자는 전자의 설교자다. 그는 자신의 삶과 인격과 전혀 동떨어진 이상화된 방법으로 하나님을 대변했다가 아무런 회중반응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설교는 원고의 문제가 아니라 설교자 자신의 삶과 인격, 전존재의 일관된 지향성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설교원고가 말하는 삶을 사는 그 설교자 자신이 설교텍스트의 일부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설교원고를 좀 활용했다고 해서 중대한 범죄인 것처럼 몰아가는 것은 지나친 점이 있다. 설교원고 작성은 고대 성경원어, 고대의 역사, 관습, 법률 등 많은 공부가 요청되는 작업이라서 현재 신대원 교역학석사과정 정도의 신학수업을 마쳐서는 신선한 설교원고 작성을 하기란 쉽지 않다. 즉 설교원고를 표절하고자 하는 유혹은 이런 목회자 양성과정에 있는 구조적 문제점과 깊은 관련이 있다. 더 나아가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과도한 심방, 행정, 기타 잡무 등은 기도와 묵상시간을 앗아가버린다. 양질의 설교원고를 작성할 여유가 없다. 이런 구조적 이유를 알고 나면 회중이 자신이 다니는 교회의 담임목사의 설교가 생수에 대한 갈증을 불러일으킬 뿐 생수가 터지게 나오는 중개기능은 해주지 못하는 현실을 타개할 길을 목회자들과 함께 찾아보아야 한다. 나 자신을 포함한 설교자들은 대개 생수가 언젠가 터질 것이다. 생수는 저기 저만치 보이는 오아시스에 가면 곧 들이킬 수 있다고 말하는 답답한 설교자로 살아가는 수준이다. 시궁창 오염수를 생수라고 강변하며 회중들에게 강권하는 설교자들도 맹활약하는 오늘날 한국교회강단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현존과 대면하게 해주는 설교자와 설교를 만나기 쉽지 않다. 설교자들은 설교원고와 평소 설교자 자신의 강단 아래의, 강단 밖에서의 삶이 한데 모아져 설교가 이뤄진다는 무서운 사실을 늘 의식하며 하나님께 정직하고 거룩하게 깨어있어야 한다. 설교원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설교자 자신이 주일강단에 오르기 전에 하나님을 대변하기에 합당한 삶을 살았는지를 점검하고 점검하여야 한다. 표절은 고도로 독창적인 사상이나 기술을 아무런 저작권 구두 혹은 문서상의 언급이나 시인 없이 남의 사상, 기술, 지식을 자신의 작품인양 사용하는 행위다. 설교표절은 하나님의 것을 마치 자신의 것인양, 거룩하고 깨끗한 선배, 동료 설교자의 삶과 그것을 반영한 설교원고를 거짓되게 사용하는 행위다. 우리는 가끔 정말 반복적으로 베끼고 싶은 모범적인 선배, 동료 설교자가 옆에 있었으면 하고 바랄 때가 있다. 나는 한경직 목사님을 사랑하고 흠모해 그의 삶까지 모방하여 그의 제자가 되었다면 그분의 1950-1960년대의 주옥같은 명설교문을 기꺼이 회중의 양해 아래 다시 들려드리고 싶을 때가 있다. 회중은 담임목사님의 설교가 다른 목회자의 설교원고를 그냥 베끼는지 혹은 설교문의 미사여구나 박학다식을 베끼는지, 아니면 그 담임목사가 아주 이상적이고 훌륭한 목회자의 삶을 모방하고 베끼는지를 잘 분별하여야 한다. 고상한 삶과 고매한 인격은 베껴야 하고 베낀다 하더라도 표절시비를 일으키지 않는다. 필자는 필자의 설교를 베꼈다고 고발당한 제자 목회자가 장문의 양심고백을 해 준 적이 있다. 그를 고발한 사람에게 다음과 같은 요지의 답변을 보내주었다. “L목사의 설교원고는 내 책에서 발췌되고 인용되었습니다. 설교원고로 보면 표절시비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설교원고, 나의 책은 L목사 같은 제자들을 상대로 가르쳐진 것이고 설교된 것들입니다. 그도 나의 설교행위에 청중과 제자로 참여했습니다. 그는 나의 제자로서 나와 같은 생각의 사람이며, 나와 삶의 지향이 동일합니다. 나는 그가 설교를 표절했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충분히 동의하고 그대로 살아내고 있는 말씀을 증거했습니다. 그는 나의 중간지도자로 알고 모방하고 배우고 익히는 도중에 있는 나의 제자입니다.” 여러 가지 구조적인 요인 때문에 설교원고를 성실히 준비 못한 목회자들이 다른 목회자의 설교원고를 표절할 수밖에 없는 상황극복을 위해 종합적인 타개책이 요청된다. 설교원고 표절을 목회자나 설교자의 개인윤리적 일탈이라고 몰아가기에는 훨씬 더 복잡한 문제가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김회권 교수/숭실대 기독교학과 # 출처 : http://www.pckworld.com/news/articleView.html?idxno=6864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