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본질과 오용③> ‘하나님 능력’의 복음 선포하라 |
느헤미야, 교회개혁 위한 제2차 연중포럼 ‘한국교회 설교, 무엇이 문제인가’ |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원장:김형원 목사)가 지난 6월 15일 오후 7시30분 느헤미야 세미나실에서 한국 교회 개혁을 위한 연중포럼인 ‘영화 <쿼바디스>에 답하다’의 제2차포럼으로 ‘한국교회 설교, 무엇이 문제인가?:설교의 본질과 오용’을 주제로 포럼을 진행했다. 이날 김형원 목사를 비롯해 배덕만 교수(건신대학원대), 권연경 교수(숭실대) 등이 발제자로 나서 한국교회 설교의 문제점과 대안을 모색했다. 발제자들의 주된 발표 내용을 정리해 싣는다. <편집자 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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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능력인 복음, 그리고 설교> / 권연경 교수(숭실대)
우리가 선포하고 설교해야 할 복음이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능력이다. 신학적으로는 당연한 이야기일 수 있지만 많은 그리스도인에게는 사실상 망각된 진리에 까갑다. 능력이 복음의 속성 중 하나라고 인정하지만 그것이 복음의 결정적 본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복음을 ‘힘이 있는’ 메시지 대신 그저 ‘아름다운’ 혹은 ‘듣기 좋은’ 메시지로 간주하는 현실은 우리의 신념이 성경의 가르침에서 얼마나 쉽게 벗어나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롬 1:56).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어리석음이지만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다”(고전 1:18, 24).
복음은 이 능력을 선포하고 약속한다.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이 능력의 원천이신 하나님께 기대를 거는 것, 그리고 그 분의 약속에 기대어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설교가 복음을 선포하는 행위라면 설교는 당연히 이 복음의 능력에 관한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
▲ 권연경 교수(숭실대)
# 복음 선포와 하나님의 능력
사복음서는 천국복음을 선포하는 예수께서 행하신 온갖 종류의 놀라운 일들로 가득하다. 사람들은 그 능력에 끊임없이 놀란다. 하나님 나라 도래의 가장 확실한 증거는 예수의 선포에 담긴 심오한 지혜가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낸다”는 사실이다(눅 11:20).
예수를 향한 믿음은 예수의 능력과 관련된다. 우리가 ‘믿음’이라는 말 속에 집어넣는 복잡한 교리들과는 달리 복음서의 맥락에서 예수를 향한 사람들의 믿음은 대부분 아픔을 치유하는 그의 능력에 대한 기대와 연관된다. 사람들은 예수로부터 치유를 기대하며 일상적 궤적을 벗어나 그에게 나아온다.
예수는 그들의 믿음에 주목하며 그들에게 치유와 용서를 선포한다. 이러한 얽힘 속에서 예수는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고 그들과 관계를 맺는다. 나병환자, 중풍병자, 하열로 고통받았던 여인, 화당장 야이로, 바디매오, 삭개오 등 그들은 모두 예수로부터 무언가를 간절히 기대했고, 이 기대로 인해 그들의 행동은 상식의 궤도를 벗어난다.
예수님은 그들의 이러한 일탈을 믿음이라 칭하셨고, 바로 이 믿음이 그들의 구원이었다. 바로 예수를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복음이었다.
능력을 핵심으로 한 예수의 사역은 제자들의 사역에서도 그대로 재현된다. 예수의 부활을 경험한 후, 사도들이 담대히 선포했던 주제가 바로 예수의 능력이었다. 베드로는 설교를 통해 예수의 가르침보다 예수의 기적과 놀라운 일과 표징, 예수와 함께 했던 성령과 능력에 청중들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예수는 하나님의 능력을 구체적으로 드러냈고, 그렇게 하나님의 통치를 구현했다”는 것이 사도들이 기억하고 선포했던 예수의 모습이었다.
능력 있는 예수의 선포가 사도들의 사역이었다면 그들의 선포 속에서도 동일한 능력이 나타나는 일은 자연스럽다. 사도들의 놀라운 이적들은 이들의 사역을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다. 예수의 사역이든 사도들의 사역이든 하나님 나라 선포가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것은 필연적이다.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했고, 사람들은 모두 은혜를 받았다(행 4:33).
# 십자가, 하나님의 능력
사도바울도 하나님의 능력을 선포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자신의 복음선포에 관해 들려주는 이야기는 매우 의미심장하다. 고린교회는 갈등과 분열이라는 치명적 문제에 시달렸고, 바울은 복음적 관점에서 이 문제를 풀고자 고군분투한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의 행태와 자신의 행보를 분명하게 대조한다. 그는 ‘지혜로운 말’로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고전 1:17). 십작가 헛되다는 것은 십자가의 십자가다움이 소실됨을 뜻한다. 물론 십자가다움이란 십자가의 능력, 곧 십자가의 메시지가 매개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가리킨다.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당하는 자들에게는 어리석음이지만 구원을 얻는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다(고전 1:18). 이 초월적 능력은 사람을 갈라놓은 모든 인간적 차별을 지운다. “부르심을 받은 우리들에게는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다”(고전 1:24).
하지만 능력체험이 모든 것을 해결하는 것은 아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영적 자부심에 넘쳤으면서도 실상은 세속적 가치에 기댄 경쟁적 삶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고, 그 결과 교회 내에서도 서로를 구별하며 차별하고 분열되는 모습을 드러냈다.
바울은 이러한 고린도 교인들의 세속적 집착과 십자가를 대조한다. 성도들 자신의 낮은 사회경제적 위상을 지적하면서 하나님의 선택이 결코 그런 세속적 가치에 좌우되지 않았음을, 오히려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는 그런 세속적 가치를 폐기처분하는 것임을 분명히 한다.
물론 약하고 어리석어 보이는 하나님의 은혜가 세사의 가치를 폐기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연역함이 세상의 힘보다 강하고,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세상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기 때문이다. 이는 “연약하기 때문에 더 강하다”는 식의 궤변이 아니다. 십자가는세속적 견지에서 어리석어 보일 뿐, 실제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하나님의 능력으로서의 복음에 대한 바울의 신념은 갈라디아서도 매우 선명하게 드러난다.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이 은혜로 그들을 불러주신 하나님을 떠나 가짜 복음으로 기울어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바울은 “여러분이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들을 통해서입니까, 아니면 듣고 믿어서입니까?”라고 말한다. 바울은 믿음은 성령을 가져다주지만 율법의 행위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물론 믿음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목적은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기 위해서였다. 십자가의 의미가 율법의 저주로부터의 속량으로 국한 될 수 없다. 바울의 생각 속에서 십자가의 결정적 의미는 그것이 성령의 원천이 된다는 사실에 있다. 결국 의의 소망, 하나님 나라 혹은 영생이라 불리는 종말론적 구원에 이르는 열쇠는 성령이다.
바울은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를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며 복음을 자랑했다. 그가 복음을 참된 진리로 확신했던 이유는 이 복음 속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이 복음을 전한다. 그리고 이 능력은 그의 복음 선포 사역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그 위력을 드러냈다. 바울은 바로 이 사실을 자신의 사도 직분에 대한 공적 증거로 제시한다.
“나는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 백방으로 참고 견디면서 표징과 놀라운 일과 기적을 행하여 내가 진정 사도라는 증거를 보여주었습니다”(고후 12:12).
바울은 이처럼 능력 있는 사역을 통해 이방인들을 “믿음의 순종”에로 이끌로자 했다. 그가 말하는 믿음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하나님”, 곧 창조와 부활의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었다(롬 4:17). 바로 이 부활신앙이 아브라함과 신약의 신자들을 이어준다.
창조와 부활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죄와 죽음이 대세인 세상에서는 믿기 어렵다. 자기 몸이 죽고 아내의 태가 죽은 상황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기 어려웠던 아브라함의 경우와 같다. 하지만 이런 불가능의 상황에서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찾아오신다. 그리고는 생명을 창조한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은 하나님의 구원 행동의 결정이다. 성경은 이것을 복음이라 부른다. 이것이 바울이 선포한 복음의 본질이었다.
# 삶의 언어를 잃지 않는 설교자
생명의 선포는 말로 완결되지 않는다. 따라서 삶의 언어를 잃은 설교는 사탄이 가장 즐겨 사용하는 수단이다. 성령에 충만한 설교자가 사탄에게 위험인 것처럼, 실천적 무신론자의 설교처럼 사탄에게 유용한 것은 없다. 이 문제를 직면하고 이 점에서 우리의 입장을 분명하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 역시 하나마나한 한 설교를 되뇌는 ‘순서담당자’에 불과하다.
복음 선포 혹은 설교에 관한 신약성서의 가르침은 분명하다. 그만큼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위기의 본질도 선명하다. 곧 복음의 능력을 상실했다는 위기상황이다. 설교자로서 우리의 책임은 우리의 삶에서 복음의 생명력을 회복하고, 이로써 우리 선포에 새로운 생명력과 확신을 불어 넣는 것, 그리하여 성도들의 마음과 삶에 생명과 부활의 하나님을 새겨 넣는 것이다.
우리의 이런 선포를 통해 하나님의 생명이 역사하리라는 기대를 갖고서 말이다. 우리 스스로가 이런 기대 혹은 ‘확신’을 잃을 때, 우리에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많은 설교자들은 마음 깊은 곳에 이런 불신을 감추고 있다는 인상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믿음이 없는 우리를 꾸짖으시는 예수님 앞에 엎드려 이런 기도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믿습니다. 저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십시오”(막 9:24).
# 원문 : http://www.theosnlogos.com/news/articlePrint.html?idxno=941